1238년, 몽골 군이 러시아의 야로슬라블 마을을 습격, 대학살이 이루어졌다.
점령 기간 동안, 엉청난 수의 주민들이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되었는데, 지금의 DNA 분석에 의해, 희생 되었던 것은 3세대의 대가족도 있었다고.
- 학살 후, 공동 묘지에 방치 된 엄청난 수의 시체
학살 후, 시신은 공동 묘지에 방치되었다. 신원을 알 수있는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모스크바 물리 공과 대학의 연구자들이, 하나의 무덤에서 발견 된 3 사체의 DNA 분석을 실시. 3명은 여성 둘과 젊은 남성으로, 어머니와 딸, 그리고 그 손자는 근친 인 것으로 나타났다.
3명 중 나이가 많은 여성은 적어도 55세, 딸은 30~40세, 손자는 미성년이었다. 이 가족의 시신이 나온 무덤은, 야로슬라블에 있는 9개의 묘지 중 하나로, 모두 합치면 300구 이상의 시신이 묻혀 있었다고한다.
인류학자들에 의한 지금까지의 뼈의 조사에서도, 3명은 혈연이 아닌듯 했다. 두개골의 특징이 비슷하고, 골격에서 척추 피열, 즉 미발달된 척수를 가진 유전성 선천이상임을 알 수 있었다.
이 3명의 가족은, 야로슬라블의 중심에있는 성곽의 주거 구멍에서 발견되었고, 이곳에는 총 15명이 묻혀 있었다.
도시가 점령되어 있던 동안, 이 부지의 대부분이 불타고 있었지만, 남아 있던 건물과 인공물로부터, 이곳은 한때 부유 한 저택이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고한다.
살해 된 가족이 부유했던 것은, 시신의 치아에서도 알 수있다. 다른 지역 주민들보다 여기의 시신의 치아는 상당히 충치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 가족이 꿀이나 설탕을 포함한 식사를 습관적으로 먹고 있던 것, 즉 신분이 높은 자였던 것을 알 수있다.
또한 근처에 묻혀있던 네 번째 시신도 외가 친척 일 가능성이 지적되고있다.
- 몽골 군에 의한 야로슬라블의 대학살
2005년부터 2006년에 걸쳐 진행된 야로슬라블의 발굴 작업에서, 1238년 2월에 대학살이 일어났던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시체에 붙어있던 구더기의 종류와 성장 단계는, 성충이 사체에 알을 낳았던 것으로 따뜻한 계절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시신은 몇 달 야외에 방치되어, 부패가 진행된 후 매장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고, 꽤 오랫동안 눈속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라고 야로슬라블 발굴 현장 책임자로 러시아 아카데미 고고학 연구소 부소장 아샤 엥고바토바는 말한다.
"4월이나 5월, 파리가 번식을 위해 사체에 알을 낳기 시작해, 5월 말이나 6월 초에, 시신은 그들이 과거생활하고 있던 장소에 묻힌 것입니다"
13세기 초 러시아로 쳐들어가 야로슬라블을 파괴 한 몽골 군은 칭기스칸의 손자로, 킵차크 칸국을 이끈 바투칸이 이끌고 있었다.
"킵차크 칸국은 평화적으로 러시아 영토를 얻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지만, 야로슬라블에서 나온 섬뜩한 증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야로슬라블 주민이 잔인하게 살해 된 증거는, 엄청난 수의 시체에 명확하게 보인다. 뼈에는 구멍이있고, 잘리고, 불에탔었다는 것.
몽골의 침략자들이 야로슬라블에서 학살을 실시, 러시아의 도시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바로 피바다에 빠진 도시였던 것. 여기 주민의 비참한 운명은 나중에 전설로 전해지게되었다.
"바투칸의 정복은, 다른 잔혹한 파괴의 역사를 흐릿하게 할 정도의 러시아 최대의 비극이었습니다. 러시아 민족에 내장 된 몇 안되는 사건의 하나 인 것은, 우연히는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