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발명과 주의, 주장에 의해 사망한 사람들

자신의 신념을 관철 한 결과, 죽어 버린 사람들...

 

긴 인생,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그것을 관철해나가며 살고 싶다.

 

타인이 생각 한 규칙이나 일에 복종하며 살기보다는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라고 하면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규범이나 규칙은 안전하다라고,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 것도 사실.

 

이번에는 그런 사회의 상식을 등지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고, 결국 사망했다는 "진정한 자유인"들 몇 명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유기농 식품을 제창 한 남자, 심장 질환으로 사망(미국)

 

유기농 식품 및 유기 재배는 이제 일반적이지만, 건강한 생활을 위해 건강한 음식을 먹는다는 개념을 발명 한 것은 유대계 미국인 J.I. 로델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몸이 약했고,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전도 허약 체질을 이유로 군에서 거부되어 버려, 그 몸의 약점을 어떻게든 탈피하고 싶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1930년, 로델은 지금까지 자신이 시험한 건강법을 홍보하기 위한 회사 로델 익스프레스를 설립하고 공연이나 저작 활동을 시작했다. 1942년에는 "유기농 퍼밍 앤 정원"이라는 잡지를 주재하고, 유기 농업과 유기 재배의 보급을 도모했다.

 

로델의 주장에 따르면, 건강한 토양은 건강한 야채를 기르고, 건강한 야채는 인간의 몸을 건강하게 한다는 것. 농약과 합성 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퇴비와 무농약 재배를 고집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제창했다. 건강한 음식을 먹으면 질병과는 무관하게 장수 할 것이라고.

 

1971년 6월 8일 밤, 72세의 로델은 TV 프로그램 "딕 캬벳 쇼"에 게스트로 출연, "나는 긴 계단도 훌쩍 훌쩍 오른다", "나는 100살까지 살꺼야" 등과 같이 이야기했지만, 녹화 중 갑자기 몸 상태가 나빠져 결국 쓰러져 버렸다. 곧바로 구급차로 루즈벨트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원인은 높은 콜레스테롤과 칼로리 섭취 과잉이 원인으로 일어나는 "심장병"이었다.


 

2. 반 헬멧 법률 단체의 남자, 자전거 전도로 머리 손상을 입어 사망(미국)

 

헬멧을 착용했더라면....

 

2011년 7월, 뉴욕의 자전거 애호가 그룹 "아메리칸 바이카즈 아임드도어 에듀케이션"이, 주의 "헬멧 착용의무화"에 항의하기 위해 550명 규모의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헬멧 의무화는 바이커의 자유를 빼앗고, 바이커의 영혼을 모독하는 어리석은 행위이다..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시위 현장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회원의 1명인 필립 A. 콘토스(위 사진은 다른 사람)가, 1983 할리 데이비슨으로 주행 중 전도. 콘크리트의 보도에 강하게 머리를 부딪치게되었다. 콘토스는 즉시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곧 사망...


의사는 "헬멧을 착용했다면 살았을텐테..."라고 말했다.



3. 자신이 발명 한 기계에 말려 들어가 사망


뉴욕에서 고아로 태어난 월리엄 블록은, 어려서부터 기계공으로 일했다. 젊은 시절부터 발명에 재능이 있었고, 면과 건초를 프레스 기계와 씨앗 재배 기계, 선반 절단기 등의 기계를 설계했다.


그 인쇄기의 개선을 시작, 1843년에 "웹 로타리 프레스"라는 인쇄기를 개발했다. 이것은 리처드 마치호가 발명 한 인쇄기의 개량판으로, 긴 종이를 연속해 인쇄하여 인쇄 절단하여 빠른 인쇄를 가능하게 한 것. 이는 1시간에 12000장의 인쇄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블록은 마음이 급했었던 것 같다. 1867년 4월 3일에 필라델피아 퍼블릭 레저 용지의 인쇄 기계를 조정하는 동안 초조했었는지, 구동하고 있는 벨트 부분을 발로 차 올려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다리는 기계의 벨트 부분에 휘말려 골절. 그 다리에 괴저가 발생했고,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 중 사망하게 되었다.



4. 자신의 발명품으로 수명이 단축 된 남자


토머스 미즐리는 GM(제너럴 모터스)의 사원으로, "유연 가솔린"의 발명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지금까지의 가솔린이라고하면, 기계의 진동(노킹)이 시끄러웠었지만, 가솔린에 테트라 에틸납을 첨가하면 진동이 일어나지 않는것을 발견 한 것이었다. 


유연 가솔린은 순식간에 보급되었지만, 대기 중에 방출 된 납은 건강 피해를 일으켜 미즐리 자신도 납 독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후 GM사는 미즐리에 "가정에서 사용할 수있는 안전한 냉매의 개발"을 명령. 미즐리는 프레온 가스를 발명하고, 가정용 냉장고와 펌프의 일반화에 기여했다. 프레온 가스는 오존층을 파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이용은 제한되어 있지만, 당시는 안전하고 안심할 수있는 획기적인 물질이라고 되어있었다.


미즐리는 51살 때 소아마비가 발병하여 침대에서 요양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말았다. 그래서 자신처럼 노쇠 한 인간이 편하게 생활 할 수 있도록, 도르래와 망을 사용해 쉽게 물건을 취할 수 있는 구조를 발명.


그러나 1944년, 그는 자신의 발명품 인 그 장치에 목이 감겨 질식사 해버렸다.



5.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괜찮은 배럴의 낙하 실험에서 사망(캐나다)


위험한 스턴트로 사망.


캐나다의 스턴트맨 카렐 소섹은, 수제의 "통"안에 들어가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떨어지는 묘기로 유명했다. 그는 폭포의 흐름과 충격 테스트를 통의 개선과 교육을 진행, 1984년에 스턴트를 감행. 이때는 성공했고, 약간 출혈만 있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 성공에 출자를 받는데 성공 한 소섹은, 그 돈으로 나이아가라 폭포의 박물관을 만들고 배럴을 전시하고 또한 180 피트의 낙하를 위한 기금을 조성했다.


그리고 1985년 1월 19일, 소섹은 180 피트 높이에서 낙하. 이 낙하는 대 실패로, 그는 중상을 입고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곧 사망에 이르렀다는...



6. 발명 한 낙하산 실험 도중 사망(프랑스)


스스로 실험 대상이 된 초기 낙하산 개발자.


오스트리아 태생의 발명가 프란츠 라이켈트는, 높은 곳에서 점프해도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는 것을 발명하기 위해 정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것은 현재의 낙하산과 같은 원리이지만, 20세기 전반은 아직 최적의 디자인이 발견되지 않았고, 프란츠 라이켈트는 실험을 반복했다.


5층 건물에서의 실험은 성공, 더 높은 위치에서 도약을 추구하려고 했던 프란츠 라이켈트는 에펠탑에서의 실험을 신청했다. 즉시 신청 허가는 내려지지 않았고, 끈질기게 신청을 거듭하여 드디어 당국은 승인을 내리게 되었는데...


1912년 2월 4일, 프란츠 라이켈트는 갑자기 "실험은 내가 직접 진행할 것"이라고 선언.


일반적으로는 인형을 사용한 테스트를 실시하지만, 논증으로 자신이 실험대가 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친구들은 놀라서 충고했지만, 그는 듣지 않고 마침내 프란츠 라이켈트는 에펠탑에서 뛰어 내렸다.


불행하게도 낙하산은 펴지지 않았고, 프란츠 라이켈트는 지상에 추락해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