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타이타닉호의 쌍둥이 자매 "올림픽호"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대형 여객선 "타이타닉"에 쌍둥이 격인 자매가 있었던 것 같다. 불운 한 동생과 달리 언니는 남은 인생을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언니는, 타이타닉호와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빼닮은 선박 "올림픽호"이다.


상징적 인 4개의 굴뚝과 구명정 수가 부족했었던 점, 잭 도슨(영화 타이타닉의 등장 인물)의 망령이 나올 법한 대형 계단까지 외모뿐만 아니라 내장까지 동생과 판박이였다.



- 같은 시기에 동일한 사양으로 만들어진 타이타닉과 올림픽


타이타닉도 올림픽도, 당시, 보다 거대하고 화려한 호화 여객선 건조를 겨루고 있었던 화이트 스타라인 사가 만든 여객선이다.


미국의 백만장자 J.P 모건이 그 자금의 일부를 담당했었고, 실제로 그는 타이타닉에 승선 할 예정이었지만, 직전에 취소되었다. 이 2척은 모든 면에서 정말 흡사했다.


당시, 세기의 전환기에 세계 최고의 호화 여객선을 건조해야 한다는 압력은, 기술면에서도 그 위엄에서도 후의 우주 로켓 경쟁에 필적했다.


<왼쪽이 타이타닉호, 오른쪽이 올림픽 호>


"이 2척이 엄청나게 거대했던 것은, 장려했기 때문이 아니다"..1999년 다큐멘터리 "타이타닉의 비운의 자매들"에서 존 맥스톤 그레이엄은 말하고 있다. "구시대로부터 새로운 시대로 향하려하고 있었고, 이민의 흐름을 더욱 확대하려고했기 때문이다"




- 올림픽 호의 처녀 항해를 맡은 선장은 타이타닉호에서 비극으로



인생을 건 여행보다는, 더 큰 시장이 있었던 것이다. 1911년 올림픽 호는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처녀 항해에 나섰다.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 그는 나중에 타이타닉에서 비극적 인 죽음을 맞이한다.


올림픽도 타이타닉도 최고의 편안함을 제공했다. 체육관과 터키식 목욕탕과 수영장, 다양한 상점, 엘리베이터, 식당 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올림픽 호에서는 2등이나 3등 손님조차 부러워 할 정도로 호화스러운 바다 여행이 가능했었다.(예를들면, 흡연실, 도서실, 식당, 전용 엘리베이터 등이 있었다)


타이타닉과 올림픽은 외관도 내장도 흡사했고, 어느쪽이 어느쪽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아래의 라운지의 사진은 파리의 카페를 모델로 한 것으로, 양쪽에 다 설치되어 있었다.



- 인터넷에 나돌고있는 타이타닉 내부는 올림픽의 것




인터넷에서 타이타닉 내부 사진을 잘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타이타닉의 큰 계단 사진은 원본 사진이 아니다.


모두 쌍둥이 언니 인 올림픽 호에서 찍힌 것이다.



- 타이타닉이 비극을 겪고있을 때, 올림픽은 도와주려고 노력했었다?


타이타닉이 비극에 처해있을 때, 올림픽은 어디에 있었을까?


첫 번째 SOS를 수신했을 때, 올핌픽은 타이타닉으로부터 약 8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곧 진로를 바꿔 전속력으로 구조를 위해 내달렸다고 한다.



올림픽이 현장으로부터 100마일(약 185km)가까이 왔을 때, 이미 현장에 도착했던 카르파티아호의 로스토론 선장은, 올릭픽의 구조의 제안을 거절하고 진로를 바꾸도록 했다.


해저에 가라앉은 배와 똑같은 배에 공포에 떨고있는 생존자들 1500명을 싣는다는 것은 좋은 생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승객이 더욱 패닉을 일으킬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이후 올림픽은 사우 샘프턴으로 항해를 계속했지만, 침몰된 타이타닉에 조의를 나타내고자 선내에서 엔터테인먼트는 일체 취소했다고 한다.



타이타닉 뿐만 아니라 올림픽호에도 충분한 구명 보트가 장착되어 있지않았기 때문에, 육지에 도착하고나서 올림픽은 당황하여 그 수를 늘렸다. 여기에는 타이타닉에서 생환 한 구명정을 더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미국이나 영국이 재해를 조사하고 있는 동안 올림픽 호는 맹활약 했다.


이러한 비극을 방지하는 방법을 특정하기 위해, 해상에서 타이타닉의 침몰을 재현하는 현장 감시에 사용 된 것이다.


- 타이타닉 침몰의 그림자에서 꿈틀거리는 다양한 음모론



타이타닉의 침몰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터무니없는 음모론까지 튀어 나왔다.


하나는 보험 사기였다는 것. 항해 전에 타이타닉과 올림픽은 몰래 바꿔치기 되어 있었고, 1912년 4월 운명의 밤에 실제로 가라앉은 것은 사실 올림픽 호 쪽이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타이타닉의 소유자, 월가의 제왕 J.P 모건이 라이벌을 계획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짜낸 사고였다는 것.


존 제이콥 에스터 4세, 벤자민 구겐하임, 이시도 스트라우스들이 자신의 라이벌이라고 주목 받고있던 인물들은 배와 함께 바다에 가라앉아버린 것이다.


올림픽은 빙산에 충돌 한 것은 아니지만, 이 배에도 상당한 드라마가 있었다.



타이타닉 침몰 1년 전 1911년, 올림픽은 영국 군함 호크와 충돌 해 선체에 두개의 구멍이 뚫렸었다.


이것이 화이트 스타사의 보험 사기라는 설을 더욱 불붙인격이 되었다.




깨진 프로펠러 샤프트 및 기타 부분을 당시 아직 건조중이던 타이타닉의 부품으로 교체하지 않으면 안되게되었다.


그리고, 1912년에는, 올림픽은 바다로 돌아왔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올림픽은 유럽에서 전쟁을 피하려고 필사적이었던 사람들을 담아 대서양을 계속적으로 오갔다.



- 전쟁에 참가한 올림픽 호


독일 U보트의 위협이 증가한 가운데, 올림픽은 153명의 승객을 태우고 마지막 상업 항해에 나서고 있었다.


이 때, 근처에 있던 영국 전함에서 SOS 신호를 받아 250명의 선원을 구조. 이후 올림픽은 정식으로 전쟁에 동원되게 되었다.



현혹 시키는 페인트로 위장 된 올림픽은 많은 부대를 수송하고, 제1차 세계 대전의 해상전에서 살아남았다.


이 전직 호화 여객선은 20만 군인을 29만 6100킬로미터 이상이나 계속 운반하여 Old Reliable(믿음직한 할머니)라고 했다.


- 그 바디를 제공하고 올림픽은 최후를 맞이...



그리고 올림픽은 온화한 장기 기증자와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1935년에 은퇴하고, 1937년에는 선박의 부품이 새로운 건물이나 선박의 재료로 매물로 나왔다. 오늘날, 영국의 노섬벌랜드 주 안위크에 있는 화이트 스완 호텔에서는, 스테인드 그라스, 벽난로, 조각, 천장, 계단, 벽 플레이트 등 올림픽 호에서 사용되었던 것을 그대로 사용한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있다.